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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이리] 그럼에도 내일을 살아야 하는 이유


이리
장률 감독, 2008년

무력감의 도시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희망

<중경>을 보고 난 뒤 자연스레 <이리>가 보고 싶어졌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연작으로 완성된 영화인만큼 <이리>를 봐야만 <중경>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과, <중경>이 보여준 절망을 <이리>가 위로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의문은 틀렸고, 기대감은 맞았다. <중경>과 <이리>는 서로가 서로의 의미를 확고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느슨한 관계를 통해 서로가 지닌 생각의 여지를 더욱 확장시키고 있는 영화다.

<중경>을 지배하고 있는 정서가 긴장감이라면, <이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력감이다. 그것은 폭발 직전의 도시(중경)와 폭발 이후의 도시(이리)라는 차이점에서 기인한다. 다만 <이리>의 무력감이 <중경>의 긴장감보다 더 절망적으로 느껴지는데, 그것은 미래에 대한 절망과 바로 지금의 절망이라는 차이 때문일 것이다. 두 편의 영화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이리>가 작은 희망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는 것이다. 폐허 속에서 피어난 조그만 꽃처럼, <이리>는 그렇게 <중경>의 절망을 위로하고 있다.


1977년 11월 11일, 약 40톤의 다이너마이트를 싣고 가던 열차가 이리역 부근에서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반경 1km 이내에 있는 건물과 가옥이 초토화됐고, 59명이 죽고 1,31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사고 발생 이후 이리는 익산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흘러가는 세월에 따라 이리역 폭발 사고도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사라져갔다. <이리>의 주인공 진서는 바로 그때 폭발사고의 미진으로 태어났다.

진서는 주변 사람들을 언제나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대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그저 폭발사고로 인해 머리가 이상해진 바보로 여길 뿐이다. 심지어 그녀를 아무 거리낌 없이 강간한다. 마치 그녀가 상기시키는 폭발사고의 상처와 아픔을 애써 지우려는 듯 말이다. 상처를 간직한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간적인 따스함은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감정이다. 진서의 오빠 태웅 역시 자신이 지닌 상처 때문에 동생이 안쓰러워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다. 그나마 진서와 유일하게 마음을 주고받는 사람들은 어린 소녀이거나, 중국어 선생과 불법체류자와 같은 외국인, 또는 노인들처럼 주변부에 속한 이들뿐이다. 그나마 그들마저도 진서의 곁을 떠나가 버리고 결국 진서는 혼자가 되고 만다.

<중경>의 쑤이는 점점 불가능해져가는 타인과의 소통 앞에서 절망하고 좌절했다. 그러나 <이리>는 진서를 통해 타인과의 소통이 이미 불가능한 곳에서는 그 어떤 진실한 관계마저도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보여준다. 진서에게 모자와 장갑을 선물하며 친절함을 보이는 한 청년은 그녀를 ‘희망터널’이라고 쓰여 있는 으슥한 터널로 데리고 가 당연하다는 듯 강간한다. 진서에게 월급도 주지 않는 중국어학원 원장은 진서가 갑자기 쓰려졌는데도 아무 일이 아니라는 듯 자기 일을 하고, 온갖 친한 척을 다하는 다방 레지는 자신이 어려움에 처한 순간 그녀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야 만다. 사람들에게 진서는 결국 자신의 이익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은 타인과의 기계적인 만남과 관계를 이어가는 우리네 모습과도 다를 게 없다. 상처를 간직한 도시 속에서 홀로 인간다움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진서는 말 그대로 천사와 같은 존재이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천사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진실, 그 진실을 통해 <이리>는 우리의 마음을 뒤흔든다.


한편, <중경>이 장률 감독이 바라본 중국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이리> 역시 장률 감독이 바라본 한국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장률 감독은 <중경>만큼 냉철한 시선으로 한국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데, 그것은 한국 사회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겸양하는 감독의 태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대신 장률 감독은 한국 사회와 관련된 단편적인 요소들을 모아 <중경>을 한국 사회에 대한 텍스트로 만들고 있다. 베트남 참전 용사는 70년대 박정희 정권을 떠올리게 하고, 불법체류자는 끝내 구속돼 쫓겨날 위기에 처하고, 그러는 동안 뉴스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 소식이 들려온다. 개발 논리로 지금에 이른 한국 현대사에 대한 거친 은유이자, 주변을 소외시키고 있는 바로 지금 한국 사회의 단면이다. 한국에 대한 좀 더 명확한 태도가 반영되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거칠게 스크랩한 단편들을 통해서라도 영화를 한국 사회에 대한 텍스트로 볼 여지를 남겨준 점은 의미를 둬야 할 것이다.

여전히 지독한 현실을 그리고 있는 <이리>지만 그 속에서도 판타지의 순간이 두 번 존재한다. 영화 중반, 옛 사랑을 찾아 어느 할아버지가 이리를 찾아온다. 할머니를 만나 조용히 벤치에 앉아있는 할아버지에게 진서는 왜 아무 말이 없냐고 묻는다. “사랑을 남들 들리게 얘기하나?” 할아버지가 대답하는 순간, 영화는 아주 잠시지만 따뜻한 감정을 선사한다. 그리고 영화는 엔딩에 이르러 다시 한 번, 예상치 못한 진서와 쑤이의 만남을 통해 미약하게나마 희망의 정서를 드리운다. 엔딩을 보았을 때 그것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다. 쑤이의 미래가 진서에게 투영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만남이다. 소통을 원하는 쑤이와 끝없는 사랑을 간직한 진서. 두 여인은 적어도 서로를 통해서 만큼은 아픔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긴다. 내일은 더욱 좋아지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내일을 살아야 하는 이유다. (★★★★)

* 조이씨네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