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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home

만덜레이 (Manderlay,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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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인 도그빌에서 누가 더 오만한가에 대해 다투었던 부녀는 만덜레이에서 배우가 교체된 체 그 논쟁이 그대로 진행된다. 니콜 키드먼의 성녀같은 이미지 때문에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가 니콜의 이미지를 그대로 구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있었는데 막상 보니 브라이스도 제법 괜찮았다. 왜냐하면 만덜레이에서 그레이스는 전편인 도그빌과는 성격이 약간 다른 캐릭터이다. 도그빌에서 일방적으로 천박한 인간성에 의해 조롱당하는 면이 강했다면 만덜레이에서는 다른 사람을 구원하겠다는 그레이스의 성녀적 이미지를 가지면서도 자신을 방해하는 사람은 그만큼 혹독한 벌을 내리는 등 억센 면이 강화된 느낌이 들었다. (포스터가 너무 못생기게 찍힌 것 같다. 막상 영화보면 옆 사진보다 훨씬 괜찮은데...) 그레이스의 아버지는 제임스 칸에서 윌렘 데포로 바뀌었는데 윌렘 데포는 그레이스의 신념을 비웃는 냉소적인 보스의 역할에 잘 들어맞는 것 같았다. 윌렘 데포는 그레이스의 신념을 비웃으면서도 딸에게 안절부절 못하는 약한 면도 보여주는데 종종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아버지와 딸이 다투는 과정에서 딸이 어머니를 끄집어내자 아버지가 안절부절 못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런 면에서 의외로 웃음을 유발한다. 누가 알았겠는가. 잔혹한 보스에게도 공처가 스러운 부분이 있었는지 말이다.

도그빌에서 인간의 천박한 인성이 다른 사람을 얼마나 폭력적으로 다룰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면 만덜레이에서 벌어지는 두 번째 실험(?)은 미국의 영원한 논쟁거리인 노예제도에 관한 내용이다. 도그빌에서처럼 실험적인 연극무대에서 벌어지는 면과 챕터 별로 나뉘어 진행되는 것은 만덜레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래서 그런지 초,중반 챕터는 비교적 이야기가 속도감 있으면서도 순조로운 면이 있다. 노예들이 스스로 살 수 있도록 그들에게 민주주의 원리를 가르치고 그들이 스스로 수확물을 거둬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레이스의 실험은 순조롭게 진행된다. 물론 위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반부터 계속 천박한 인간성을 보여줌으로써 숨막힐 것 같았던 도그빌에 비하면 이야기는 흑인들을 다룬 휴머니즘 영화와 비슷한 면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나 라스 폰 트리에의 냉소와 조롱은 후반부에서 발휘된다. 인간의 천박한 인간성을 후반부에서 보여줌으로써 다시 한 번 감독은 그레이스를 실험대에 올려놓는다. 도그빌의 잔혹함과 천박성에 비하면 그 충격과 고통은 덜한 편이지만 드러나는 추악한 진실은 천박한 인간성에 대한 조롱이 여전하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만덜레이에서 드러나는 추악한 인간들의 모습은 백인들의 흑인차별에 대한 고도의 조롱이다. 도그빌 주민들의 추악한 모습은 충격적이지만 그 추악함을 만들어낸 것은 미국의 빈민들을 비참하게 다루는 미국의 사회에서 비롯된 것임을 감안한다면 역시 만덜레이에서의 천박한 인간의 모습을 만들어낸 것은 다름아닌 미국의 백인들인 것이다. 영화 초반 그레이스의 아버지는 그레이스가 어릴 적 새를 풀어주었지만 결국 죽어버린 예를 들어 그레이스가 남을 가르치려 드는 천성을 조롱한다. 새를 풀어주는 건 자유를 주는 인도적 행위 같지만 새는 그 인도적 행위로 죽어 버린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새는 인간들에게 길들여진 나머지 새의 천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새장을 벗어나는 순간 그 새는 죽어버린다. 새가 살 수 있는 길은 간단하다. 애초에 새를 새장에 가두지 말고 새의 본성대로 살아가도록 나두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새가 살아남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다.  그 새는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새장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새는 인간의 천성에 길들여진 면도 갖고 있지만 새 자신이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다. 새는 자신이 밖에 나간다면 결국 인간들에게 살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새는 새장이 열려 있더라도 나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