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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home

선인을 위한 소나타(타인의 삶, 2007)

  마리 A에 대한 회상
 - 베르톨트 브레히트


1
푸르렀던 9월의 어느 날
어린 자두나무 아래서 나는
말없이 그녀를, 그 조용하고 창백한 사랑을
우아한 꿈을 꾸듯 품에 안았다.
우리 머리 위로 아름다운 여름 하늘에는
오랫동안 보아 온 구름 한 점 떠 있었다.
아득히 높은 곳의 새하얀 구름은
내가 올려다보았을 때, 이미 사라져 버렸다.


2
그날 이후 많은 세월이
소리 없이 흘러가 버렸다.
자두나무들은 베어져 없어졌을 것이다.
그 사랑이 어떻게 되었냐고 너는 나에게 묻는가?
나는 기억할 수 없다고 말하련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정말 생각 나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얼굴에 키스한 적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3
구름이 거기 떠 있지 않았더라면
그 키스마저 오래 전에 잊어버렸을 것이다.
새하얗고 높은 데서 흘러온 그 구름은
지금도 생각 나고 앞으로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자두나무에 변함없이 꽃 피고
아마 그 여자는 이제 일곱 번째 아이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때 구름은 잠깐 동안만 피어 올랐다가
내가 올려다보았을 때, 이미 바람에 실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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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자가 로맨티스트라는 사실은 결코 이율배반적이지 않다. 그가 이상을 꿈꾸는 로맨티스트가 아니었다면, 추악한 세상에 타협하는 일을 손쉽게 선택했으리라. 영화 <타인의 삶>의 미덕은 체제가 변하듯 타인에 의해 인간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체제는 무너졌을지을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혁명을 꿈꿨던 사회주의자라는 것이다.


냉전체제가 붕괴되었을 때 유토피아도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기에 언제나 존재하는 유토피아의 빈자리는 결코 비워둘 수 없는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가 사라지자 자본주의 현실이 거대한 역사적 사유로 배제되었던 개인의 욕망으로 되돌아왔고, 흑백논리 같았던 맹신과 불신 대신 끝없는 환멸이 들어섰다. 한 시대를 지배했던 가치가 무력해지면 사람들은 그것을 해체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며, 무엇도 그것을 대체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 체제에서 사람들은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답은 하나밖에 없다. 모든 체제는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문을 바꿔서 물어야만 한다. '이 체제에서 누가 행복하고 누가 불행한가?' '만약 체제가 바뀐다면 누가 행복해지고 누가 불행해질 것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또다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철학과 정치는 여기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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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에서 비밀스러운 관객처럼 드라이만과 질란트를 감시하던 비즐러는 서서히 그들의 삶에 끼어든다. 그리고 체제를 위협하는 글을 쓰는 드라이만을 위해 감시 보고서의 희곡을 직접 쓰게 된다. 나중에 드라이만이 읽게 되는 그 희곡은 그들이 레닌을, 즉 사회주의적 혁명과 신념을 믿었음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철저한 사회주의자들이었고 체제에 실망한 뒤에도 그곳을 떠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 그들의 실망은 브레히트와 같다. 혁명이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절망이 아니라 당이 애초의 목적을 잊고 체제를 변질시킴으로 초래한 비도적인 현실에 대한 혐오였던 것이다.


<타인의 삶>은 우리에게 되묻는다. 장벽을 철거하고 자유를 가져온 1989년의 사건이 사회주의가 꿈꿨던 유토피아처럼 평범한 소시민의 삶까지도 혁명적으로 행복하게 변화시켰는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안다. 분명히 무언가는 달라졌다. 그러나 해방 후 한국사회처럼 가해자는 여전히 체제의 지도자로 군림하고, 희생자는 여전히 희생자일 뿐이다. 과오는 희생보다 쉽게 잊힌다. 지난 시대가 유예되었던 평가를 받으면 사람들은 비난하기보다 그 시절과 화해하기를 원한다. 아도르노가 말하듯 자유에 대한 성찰은 그것이 공공연하게 억압과 대립하고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어려워진다.


영화 속에서 비즐러가 소파에 누워 읽던 브레히트의 아름다운 연애시, ‘마리 A에 대한 회상’은 한나 아렌트가 이야기하듯 지금은 사라진 어떤 강렬한 순간을 불러일으킨다. 불확실한 이 세계에서 모든 것은 덧없고 어떤 것도 영원할 수 없다. 역사, 국가, 체제 같은 거대한 이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한 사람에게서 첫사랑은 지나가는 것이고 청춘은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것이 애틋한 이유는 그 순간 우리는 서툴었고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 서투름, 그 약함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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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시절 어두운 세계를 살아가던 사람은 열정을 가지고 세계를 바꾸려고 했다. 그 정열은 허무하고 덧없는 것이지만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어느 여름날 새하얀 구름은 푸르른 하늘에 잠시 피어올랐다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그 하늘과 함께 보았던 아름다운 자두나무는 베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실을 확인한 것은 아니다. 자두나무는 아직도 거기에 굳건히 서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역사적 시도가 철저히 실패했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그때 그곳에서 우리를 사로잡았던 것은 단 한 조각의 하늘이
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꿈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추악한 세상에 굴종하고 습관적인 분노와 절망에 길들여질 것이다. 브레히트의 유명한 희곡 <사천의 선인> 속의 여인처럼 <타인의 삶>의 인물들은 자신의 타협에 괴로워하다 비극적으로 죽거나 신념과 함께 목소리를 잃어버리거나 그 지위조차 잃고 무미건조한 생활을 이어간다. 그렇다고 해도 선한 일은 여전히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선한 자들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법이다. 우리들 중 누구도 그 같은 고정관념을 버리고 싶지 않을 것이다.


시간은 한 시대의 고통과 절망을 풍화시켰고 이제 우리는 선한 일을 하기 위해 악해진 한 사람의 시대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세월은 지금도 소리 없이 흘러가지만 현실의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현실 세계의 악과 마주하고 있다.
<타인의 삶>은 우리가 힘겹게 지나온, 그리하여 지금 마주하고 있고 또 앞으로 대면해야 할 무거운 역사를 연약하고 아름다운 한 사람의 기억으로 들려준다. 그래서 몹시도 아름답지만 귀에 쉽게 감긴다고 말할 수는 없는 우리 시대의 '선인을 위한 소나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