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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에밀 쿠스트리차 & 노스모킹 오케스트라

내가 아는 에밀 쿠스트리차는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자랑하며 깐느 영화제 황금 종려상을 두번이나 탄 (지금까지 두번 탔던 감독은 총 네 명으로, 나머지 세 명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이마무라 쇼헤이, 빌 어거스트라고 하네요.) "영화감독"으로서의 존재감과 빠트리스 르콩트 감독의 <1850 길로틴 트래지디 (The Widow of Saint-Pier)>에서 인상깊었던 사형수로서의 연기, 그리고 그가 기타리스트밴드 활동도 한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던 정도였습니다. 호기심에 사 놓고 듣지는 않았던 Emir Kusturica & the No Smoking Orchestra 의 앨범 <Unza Unza Time>을 이번 내한 공연 가기 며칠 전에 들어보았습니다. 음악을 들은 느낌은 솔직한 심정으로 "웃기다"라는 거였는데, 그들의 음악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고, 빠른 템포의 "쿵짝쿵짝"(그들 표현으로는 "운자운자") 비트가 강조된 록큰롤 집시음악을 듣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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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젯밤(6/24) 큰 기대는 하지 않고 LG아트센터를 찾았습니다. 공연을 본 느낌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유쾌하고 재미있었다" 입니다. 첫장면에서 그들의 타이틀을 비추면서 흘러나오는 웅장한 음악을 들으며, 이 공연이 왠지 코믹할 거라는 예감이 들기는 했지만, 그  예감을 뛰어넘는 무대를 보여주더군요. 흰색 바지들을 빼입고 등장한 밴드 멤버들이나 빨간색 실크 셔츠를 입고 뛰어나온 보컬을 비롯하여, 요란법석 시끌벅적한 연주와 퍼포먼스가 2시간 동안 이어졌습니다.

보컬, 기타 두 대, 베이스, 드럼, 아코디언, 색소폰, 바이올린, 튜바 등으로 구성된 밴드 멤버들은 쉴새없이 재미있는 율동을 보여주거나 방방 뛰어다니며 분위기를 띄웠고, 자그마한 체구지만 쇼맨쉽 넘치는 보컬은 관객들이 결코 지루하지 않도록 만담을 늘어놓더군요. 정성스레 적어놓은 한국말을 중간중간 끼워넣기도 하고, 관중석으로 뛰어나가 돌아다니기도 하고... 어젯밤의 붕 뜬 분위기와 뜨거운 열기를 글로 설명하려니 잘 전달이 안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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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그들 앨범의 곡들과 쿠스트리차의 영화 <집시의 시간>,<언더그라운드>,<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등에 삽입되었던 곡들을 연주했고, 가끔씩 핑크 플로이드나 딥 퍼플의 유명한 멜로디를 끼워넣어 그들의 음악적 영향을 드러내려는 것 같더군요. 굳이 음악적 장르를 설명한다면 "발칸의 전통음악 + 재즈 + 펑크 + 로큰롤 + 테크노 + 라틴음악" 등이 혼합된 음악이라고 하는데, 제가 느끼기에는 그리스 여행 때 들었던 전통음악 ("오빠!"라고 들리는 추임새가 들어가는 경쾌한 음악)에다가 러시아의 슬픈 곡조, 집시 풍의 분위기가 합쳐진 음악이랄까요...

하지만 전반적으로 음악보다는 쇼가 더 인상적인 공연이었습니다. 관객석으로 뛰어나온 보컬이 여성 관객과 즉석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Was Romeo Really a Jerk?" 라는 곡을 연주할 때에는 줄리엣을 찾아야 한다고 하면서 관객석을 둘러보더니만, 영화배우 예지원 씨를 골라서 무대로 불러내어 멋진 댄스쇼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미리 섭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긴 했지만...:) 다른 곡에서는 기타를 벗어던지고 막춤을 추는 에밀 쿠스트리차의 모습도 볼 수 있었고 (잘 추기보다는 열심히 추더군요), 마지막 피날레에서는 40명이 넘는 관객들을 무대로 이끌어내서 멋진 춤판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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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중간에 아방가르드한 퍼포먼스(검은 천으로 온몸을 가리고 앞에 세운 인형을 조정하며 추는 춤 등)나 행위예술 수준의 공연이 곁들여졌고, 바이올린 연주의 경우에는 갖가지 기묘한 자세로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게 콘서트인지 서커스인지 헷갈릴 정도로  만들더군요.

영어로 된 곡들은 어느 정도 내용이 들려서 그 풍자적인 가사를 재미있게 들었지만, - Upside Down (Life is just a simple game between up and down), Devil in the Business Class 등등 - 그들의 언어로 노래할 때에는 가사를 알아들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단지 조금 거슬렸던 것은 가끔씩 정치적 발언이나 구호를 외치면서 무슨 의미인지 알려주지 않을 때였는데, 저항 음악을 하는 만큼 구호를 끼워 넣는 것은 좋지만, "OOO 코소보" 같은 구절을 관객들에게 따라하게 만들 때에는 최소한 무슨 뜻인지 알려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쿠스트리차는 2004년에 <Life is a Miracle>라는 영화를 만들었고, 그가 노스모킹 오케스트라와 2005년에 낸 라이브 앨범의 제목은 <Live is a Miracle>입니다. 자유롭고 낙천적인 집시들의 삶의 긍정을 노래하는 듯 했던 이 공연은 "삶은 축제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솔직히, "축제"보다는 우리네 전통의 "잔치" 같은 분위기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는 쪽이 맞겠네요. 결혼식 때 함께 벌어지는 "마을 잔치"에 초대받은 느낌이랄까요. 어쨌든 세르비아의 집시 록 밴드 노스모킹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보고 나서 든 생각은 "저항음악이 이렇게 신나고 유쾌할 수 있구나" 하는 즐거운 감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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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밴드는 실제로 2005년 칸 영화제에서 깜짝 콘서트를 연 적도 있고, 지금 세계 투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티셔츠 뒤편에 투어 일정이 빼곡이 적혀 있더군요. 이 밴드에 대해서 궁금하신 분들은 공식 홈페이지 http://www.thenosmokingorchestra.com/에 가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비슷비슷한 음악만 듣다가 이렇게 색다른 음악을 듣는 것도 "문화적 다양성"면에서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에밀 쿠스트리차도 이렇게 우리나라까지 공연을 오는데, 이참에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도 그의 영화에 등장하곤 하는 그 독특한 핀란드 락 밴드를 데리고 세계투어를 해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