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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용의 문신을 한 소녀




헐리우드판 <밀레니엄>의 실패는

말하자면, BBC 드라마 <셜록>의 성공과 반대편에 놓여 있다. 

<셜록>이 한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지배했던 

오만한, 구식이면서도 현대적인 런더너 그 자체라면

데이비드 핀처의 <밀레니엄>은 매끄럽게 미국식으로 재현된 스웨덴 사회다.

이런 중역이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으나,

원작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기대했던 스웨덴의 풍경은 

재미있게도 헐리우드판에 들어 있었다.

복지, 교육, 노동 분야에서 최고의 롤모델인 스웨덴 사회가

한편으로는 이케아, H&M, 발렌베리 같은 대기업으로 전 세계를 장악하고 있듯

스웨덴 영화는 실제 스웨덴 사회에 대해 다르게 보여줄 것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또다른 스웨덴 추리소설에서 쿠르드 발란더 형사가

끊임없이 한탄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미니시리즈 드라마를 두 시간 반짜리 영화로 요약해놓은 스웨덴 영화 <밀레니엄>은 

뭉텅뭉텅 소설의 내용을 잘라내고 상당 부분을 다르게 각색해서

(어떤 면에서는 고전적인) 스릴러물의 차가운 색채를 강화시켰다.

즉, 살인자의 광기를 단순화시키고

정의감에 불타는 저널리스트를 매장시킬 뻔한 현대판 악당을 배경화시켰으며,

치명적인 바람둥이 미카엘의 매력을 줄이고

여주인공 리즈베트의 트라우마를 극복 가능한 것으로 순화시킴으로써

로맨스를 당연한 것으로 만들었다.

(기억력이 좋다는 미카엘의 칭찬에 리즈베트가 격노할 때 

원작을 모르는 관객은 몹시 당황스러울 것이다)

이런 건조함 때문인지 영화는 화려하고 웅장한 <밀레니엄> 원작 소설보다는 

평범하지만 뛰어난 발란더 형사가 동료들과 고군분투하며 

미궁에 빠진 사건(바꿔 말해, 점점 폭력적이 되어가는 현대 사회의 범죄)를 해결하는

헤닝 만켈의 소설 같다.


물론 훨씬 인상적인 장면들도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흑백 사진 속에 소녀는 

베르메르의 명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연상시킬 만큼 신비스럽고 아름답다.

연속으로 찍힌 사진들이 노트북 화면에서 동영상이 되어

담담하던 소녀가 불안한 표정을 드러내며 숨겨진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낼 때

그 긴장감은 소설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놀라웠다.

마찬가지로 소설에는 없었던

미카엘이 아름다운 두 소녀와 함께했던 유년 시절을 떠올리는 회상신 역시

관능적이고 가벼운 현기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내가 상상했던 리즈베트는 결코 누미 파파스가 아니었다.

부모와 가족이라는 친밀한 존재가 가르쳐주는 인간의 선의,

교사, 경찰과 의사로 대변되는 공권력과 사회의 정의를 신뢰하지 않는

영리하고 폐쇄적인 그녀는 고스족의 외양이 보여주듯 도발적이고 반사회적이지만,

작은 체구 때문에 십 대로 오인받듯

한편으로는 끔찍한 과거에 속박당하고 있는 고독한 소녀이다.

그녀는 모든 사회부적응자와 마찬가지로 

분노와 증오를 드러내는 한편으로

방어적으로 슬픔과 절망을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다.

악에 받친 리즈베트가 강하고 적극적일수록

(두 주인공이 어렵지 않게 친밀해지듯)

거꾸로 휴머니즘이나 사회에 포섭되기 쉬워진다.

그러나 리즈베트의 매력은 셜록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사회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소시오패스적인 면모이다.




스웨덴판을 보고 난 뒤 나는,

현대 사회의 거대 범죄를 파고드는 미카엘과 '밀레니엄' 잡지사의 철저한 저널리즘, 

스웨덴의 근대사를 따라 성장한 대기업 방예르 일가의 추악한 비밀과 연쇄 살인사건, 

살란데르라는 기이한 존재와 얽혀 있는 엄청난 비밀과 잔인한 범죄,

이 세 축이 맞물려 돌아가는 이 방대한 소설을 


그대로 살리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데이비드 핀처는 놀랍게도

헐리우드가 자본과 기술, 인력풀이 최고인 곳임을 증명하며

복잡한 설계도와 같은 <밀레니엄>의 세계를 세련되고 친절하게 영화화해낸다.

때로는 그 친절함이 과해 보이기도 했지만

원작을 충실하게 살리면서도 영화라는 장르에 맞춰 각색한 디테일들은 

납득할 만하거나 어떤 부분에서는 더욱 뛰어났다. 

모두가 중요한 체스말인 등장인물이 빠짐없이 등장하고,

아쉽기는 하나 기자 출신의 작가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저널리즘이

기업 범죄와 '밀레니엄' 잡지사의 싸움을 통해 나름 살아 있다.

(마지막에 어마어마한 비자금을 터는 리즈베트의 복수는 통쾌하기까지 하다)


내가 소설에서 가장 좋아했던 장면,

자폐아 같은 리즈베트가 이른 아침 아파트로 들이닥친 미카엘을 

당황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첫 대면신은

두 사람의 관계를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필요없이 한순간에 그려낸다.

핀처는 원작의 길고 구불구불한 미로를 헤매느라 내가 놓쳤던

두 인물의 빛과 그림자 같은 대비를

각각의 에피소드를 동전의 양면처럼 교차시키면서 시각적으로 형상화시킨다.

인간이 선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악인들을 가차없이 처벌하는 리즈베트는

정의롭기에 때로는 어리석은 수퍼 히어로 블롬크비스트를 비웃지만

그런 그녀를 구원해주는 것은 바로 그이다.

그래서 소설과는 다르게 각색한 헐리우드판에서

하랄드가 나치를 옹호하는 자신이 세상과는 달리 솔직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장면과

(이 장면은 대담하고 멋지다)

리즈베트가 미카엘을 죽이려고 한 살인자를 죽여도 되냐고 묻고 동의를 얻는 장면은

(리즈베트와 미카엘의 논쟁은 뻔해 보이나 그래서 아주 중요한 것이다)

우습게도 넌센스가 된다.


<밀레니엄>은 어른들의 해리 포터 시리즈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보는 사람의 집중력을 요하는 이 복잡한 이야기는 

세계화와 후기 자본주의 시대가 마주한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성의 결여된) 선의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악당은 더욱 매력적이고 화려한 모습으로 영웅이 될 것이다.

데이비드의 핀처의 <밀레니엄>이 실패했다면,

흔히 헐리우드의 웰메이드 블럭버스트를 비웃듯이

일견 쓸모없어 보이는 인문학이 이르는 당연한 결론이 

사실은 끝없는 회의와 고뇌를 바탕으로 이르렀기에 가치 있고 

반대로 취약하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쉽게 간과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영화화될 수 없었던 밀레니엄의 이야기야말로

사실은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조각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