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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아귀레, 신의 분노 (Aguirre, Der Zorn Gottes,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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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아트 오픈 기념 라틴 아메리카 영화제 상영작들 가운데 하나인 <아귀레, 신의 분노>를 봤습니다. 베르너 헤어조그 감독의 작품은 몇 년 전에 비디오로 <이자벨 아자니의 벰파이어>(Nosferatu : Phantom der Nacht, 1979)를 본 것이 처음이었는데요, 그때는 어떤 감독 작품인지는 몰랐었고 단지 평소에 관심이 많은 드라큘라 영화인데다가 이자벨 아자니가 주연이라고 해서 빌려다 봤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E. 엘리아스 메리지 감독의 장편 데뷔작 <쉐도우 오브 더 벰파이어>(2000)가 세간의 화제가 되어 인상깊게 감상했던 것도 이유라고 할 수 있겠네요. <쉐도우 오브 더 벰파이어>는 1920년대 독일 표현주의 영화인 <노스페라투>를 만드는 과정에 관한 영화였습니다. 영화 감독(존 말코비치)가 사실적인 흡혈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진짜 흡혈귀(윌렘 데포)를 캐스팅하게 된다는 설정이었죠. 베르너 헤어조그 감독의 <이자벨 아자니의 벰파이어>는 바로 그 <노스페라투>를 리메이크한 영화인데다가 흡혈귀로 출연한 클라우스 킨스키와 윌렘 데포가 무척 닮은 인상을 가진 배우들이기까지 하니 세 편의 영화는 이리저리 서로 얽히고 섥힌 관계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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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귀레, 신의 분노>는 나타샤 킨스키의 아버지인 클라우스 킨스키라는 배우를 알게 된 이후 포스터를 볼 때마다 항상 궁금해했던 작품이었는데 드디어 그 실체를 확인하게 되었네요. 그래서 개인적인 오랜 궁금증을 풀었다는 것만으로도 저에게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감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영화 감상의 기준으로 봤을 때에도 <아귀레, 신의 분노>가 여전히 볼만한 작품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영화란 것이 빛의 예술이기도 하지만 청각적인 부분을 절대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귀레, 신의 분노>를 보면서 크게 느낄 수 밖에 없었는데요, 이 영화가 굉장히 오래된 영화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화면의 때깔이 아니라 후시 녹음에서 느껴지는 낯선 청각적 체험 때문이었습니다. 더빙된 독일어 대사들이 주는 낯선 느낌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될만 하자 이번엔 피를 대신해서 사용된 빨간 물감이 눈에 거슬립니다. 총기나 특히 대포의 사용도 거칠기 짝이 없고 카메라의 앵글도 역시 어색합니다. 한마디로 사실감이 너무 떨어집니다.

그러나 <아귀레, 신의 분노>가 지금의 기준에서나, 그리고 당시의 기준에서조차도 완성도가 한참 떨어진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장면마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몽타주들입니다. <놈놈놈>을 보면서 '편집자의 고뇌가 느껴졌다'던 영진공 철구님의 글이 생각나더군요. <아귀레, 신의 분노>에 비하면 <놈놈놈>은 이어붙일 수 있는 그림들을 꽤 많이 찍어온 축에 속합니다. 바꿔 말하자면 <아귀레, 신의 분노>는 없는 그림을 갖고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낸 편집의 기적에 속합니다. 설마 베르너 헤어조그 감독이 편집까지 직접 했겠거니 했는데, 지금 확인해보니 편집자는 베아테 마니카-옐링하우스라는 분이 하셨군요. 워낙에 앞뒤가 듬성듬성한 장면들로 가득한 영화이다 보니 내러티브의 유연한 흐름 보다 장면 장면의 상징성을 중요시했다는, 꿈 보다 좋은 해몽이 덧붙여졌던 것이 아닐까요? 사실은 거의 한 편의 영화로 이어붙일 수 없는 필름들을 그냥 버릴 수가 없으니 편집자가 '개봉이 가능한 수준'으로 가까스로 이어붙였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림과 대사 만으로는 의미 전달이 불가능하다는 판단하에 배우가 아닌 다른 목소리의 나레이션까지 덧붙여진 것일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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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 킨스키가 촬영 중에 베르너 헤어조그 감독을 암살하려고까지 했었다는 후일담이 말해주듯이 <아귀레, 신의 분노>의 촬영 현장은 그야말로 광기의 행군이요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존 밀림 속을 헤매고 다니는 등장 인물들의 미칠 것 같은 심정은 어쩌면 연기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영화에 대한 순수한 관객 만족도는 그 작품이 갖는 영화사적인 의미나 촬영 중에 있었던 전설적인 일화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기준을 감안하더라도 여전히 조악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만듬새를 보이는 가운데 <아귀레, 신의 분노>에서 가장 봐줄만한 것은 역시 배우들의 연기입니다. 그나마도 앞뒤 문맥이 잘 살아나지 않아 아쉬움이 남습니다만 클라우스 킨스키의 광기 어린 얼굴을 비롯해서 등장 인물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진중한 모습들이 그나마 이 영화를 지탱해주는 근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신의 분노'라 칭하는 아귀레(클라우스 킨스키)의 마지막 모습은 아마도 <아귀레, 신의 분노>를 봐야할 가장 큰 이유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카메라를 실은 보트가 강물 위에 남긴 물결이 앵글 안에 그대로 들어오는 형편이지만 그 안에 남겨진 것은 제국주의의 역사와 지옥과도 같은 그 내면의 풍경인 것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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