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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더 걸> 그냥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진실이 어떤 얼굴을 했는지

<더 걸> 그냥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진실이 어떤 얼굴을 했는지

Germany;1990;94min;color
Director:Michael Verhoeven
Cast:Lena Stolze, Hans Reinhard Müller

"가치와 무관한 학문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강의 시간에 무턱대고 선생님께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냥 큰 생각이 없이 한 질문에 선생님이 옳다구나 싶으셨는지 강의 내용보다도 여기에 대한 토론을 더 많이 한 기억이 있다. 아마도 공부를 하는 사람이면 학문의 가치 중립성에 대해 나름의 심각한 고민을 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학문의 가치 중립성이라는 것이 그렇다. 사회과학은 그 성격상 언제나 '가치'에 노출되기 쉽다. 정치학은 정치인들에게 경제학은 경제인들에게 이리저리 뜯기기 마련이다. 가장 가치 중립적이라고 여겨지는 순수과학 조차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물리학을 연구한 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미사일, 핵개발에 이용될지 몰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학문의 가치 중립성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인가? 문제는 가치 중립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견했다고 해서 그를 욕할 수 없다. 이를 전쟁 목적으로 이용한 정치인과 당시 전시 상황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 그렇다면 가치 중립성은 결과가 아니라 연구 방법에서 찾아야 한다. 제대로 된 학자에게 연구 방법에 있어 가치 중립성은 최고로 추구해야 가치이다. 애초에 현실적인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학자로서의 자질을 의심해야 한다. 천리 밖을 내다볼 줄 아는 학자라서 자신의 연구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어떤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을지 하나부터 열까지 예측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대개는 그렇지 못하다. 하지만 그게 무서워 연구를 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학자가 아니다.

결론은 연구 과정과 방법에 있어 특별한 목적이 없어 순수성, 중립성을 추구하는 것이 학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다. 특정한 정치적, 금전적 목적이 과정에 섞이지 않은 순수한 연구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 하지만 현실은 학자에게 그다지 녹록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익이 달린 연구일수록 학자는 여기저기의 보이는, 보이지 않는 압력에 노출된다. 역사연구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가 된다. 특히 감추고 싶은 과거를 가질수록 이를 노리는 학자의 시선은 항상 견제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1990년에 독일의 미하일 페어회벤 감독의 <더 걸>은 한 여성의 순수한 학문적 욕구와 이를 방해하는 현실 사이의 갈등을 그리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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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걸>의 주인공 소냐는 독일의 안자 로스무스(Anja Rosmus)라는 실제 여성을 모델로 하고 있다. 70년대 파사우(Passau)라는 독일의 소도시에서 살았던 그녀는 2차세계대전 당시 마을이 숨기고 있던 추악한 과거를 폭로한다. 그녀는 누구를 공격하기 위해서, 누구를 띄워주기 위해서, 혹은 어떤 대가를 바라고 자신과 가족의 안녕을 담보한 채 연구를 진행한 것이다. 단지 '진실'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 순수한 학자적 욕구가 그녀를 이끈 것이다. 영화는 그녀의 궤적을 필징이라는 가상의 마을에 살고 있는 소냐라는 인물이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소녀는 카톨릭 집안의 장녀로 태어나 카톨릭 여학교에서 부모님과 선생님의 총애를 받으며 성장한다. '유럽의 자유'를 주제로 전국 글짓기 대회에서 1등을 수상할 정도로 뛰어난 인재지만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여느 여학생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우연지 않은 기회에 그녀는 마을의 비일을 알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우리 마을'이라는 주제로 새로운 글짓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 동안 나치에 대항하고 유태인을 지키는 데 앞장섰다고 알려진 지역신문 편집장과 신부의 추악한 과거를 알게 된 것. 마을 사람들의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었던 그들은 전쟁 당시 나치의 충복으로 유태인 탄압에 앞장섰던 이들이었다.

소냐는 자신들의 비밀을 철저히 감추려 하는 이들의 방해를 극복하고 진실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간다. 하지만 소냐를 괴롭히는 것은 비단 당사자만이 아니다. 마을과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통념과 상식을 뒤엎으려는 그녀의 시도는 주민들의 눈총을 받게 되고 심지어 신나치주의자들에게는 테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그녀를 옆에서 지켜주던 남편 역시 베를린으로 떠난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그녀가 계속 걷도로 만든 것은 진실을 알고 싶다는 연구자의 욕구였다. 그런 순수성이 없었다면 그녀는 아마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었을지 모른다.

그녀의 연구가 사실로 밝혀지고 전국적 인기를 얻게 되었을 때, 그녀를 비난하던 사람들은 오히려 소냐를 영웅으로 대접한다. 그녀를 위한 흉상을 만들고 그녀의 업적을 칭송한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기쁘지 않다. 애초에 소냐는 대가를 바라고 연구를 시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앞으로 더 드러내야 할 진실에 목마를 뿐이다. 그런 그녀에게 자신의 연구를 방해한 사람들의 달콤한 칭찬은 위선이자 거짓으로 느껴질 뿐이다. 영화는 어찌보면 소냐의 영웅적인 모습을 그리기 보다는 한 소녀의 순수한 욕심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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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전혀 메시지가 없는 영화는 아니다. 일본에서도 저런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역사 의식이 부재한 바다 건너 일본을 원망하게 되지만 현재 우리에게도 날카롭게 던지는 물음이 있다. 우리의 멀지 않은 기억에 황우석 사건이 있다. 대한민국의 과학을 앞으로 책임지게 될 차세대 리더로서 그는 전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의 연구의 상당 부분이 문제가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PD수첩과 한 연구기관에 의해 제기된 문제에 대해 최초 사람들의 반응은 분노였다. 신이 되어 버린 과학자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그들의 믿음에 상처를 낸 방송과 학자에 대한 원망이었다. 또 하나가 있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위원회, 해방 후 아직까지 정리되지 못한 친일의 문제를 지금이라도 해결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조직이다. 비슷한 스펙트럼에서 민족문제연구소도 있다. 이들의 친일행위자 규명은 어찌보면 정의를 위해 질서를 뒤엎겠다는 전복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임에는 틀림없다. 더 많은 사건들이 있겠지만 두 가지 사례에서 중요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소냐의 사례처럼 연구자들이 얼마나 순수한가의 여부이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는 판단은 쉽게 내리지 않겠다. 다만 두 사건 모두가 우리에게 학문과 현실이 어떻게 관계맺음을 해야 하는지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점은 사실이다. 학자의 순수성이 위협받고 지켜야 할 필요가 있는 현 지금 시점에서 <더 걸>은 그저 영화로만 넘기기 힘들게 느껴진다.

영화의 형식 역시 범상지 않다. 1990년에 만들어진 영화치고는 형식적으로 상당히 독특한 시도를 하고 있다. 마치 객석에 앉아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기분으로 영화를 보게 된다. 배우들의 연기와 표정이 간간이 과장되고 갑작스러운 화면변화와 세트의 등장은 연극적 요소가 강하다는 느낌을 준다. 진지하고 무거운 내용을 다루면서도 간간히 유머와 위트는 극의 긴장을 효율적으로 조절한다. 소녀부터 3아이의 엄마까지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주는 레나 스톨체라는 배우가 대단히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