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 theater

더 킹 (The King, 2005)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소리 소문도 없이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주연의 영화가 개봉했길래 보고 왔습니다. 2005년 영화니까 미셸 공드리 감독의 <수면의 과학>(2006) 보다 먼저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컴퓨터 상에서 조그만 사이즈의 이미지로 포스터를 볼 때에는 몰랐는데 씨네큐브 광화문 2관 앞에 세워진 큰 포스터를 보니 "2008년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관객상에 빛나는 제임스 마쉬 감독"이라는 카피가 눈에 띄더군요. 선댄스 심사위원 대상이라고 하니까 올해 초에 봤던 <브릭>(2005)이 생각나면서 기대감이 급상승했습니다. 그러나 2005년작인 <더 킹>이 2008년 선댄스에서 상을 받았을 리가 없죠. 영화를 본 후에 확인한 바로는, 제임스 마쉬 감독의 2008년작 <Man On Wire>가 <더 킹>의 포스터에 언급된 선댄스 2개 부문 수상작입니다. IMDb 평점이 무려 8.7에 달하는 <Man On Wire>는 1974년에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서 외줄타기를 감행했던 필립 쁘띠라는 인물에 관한 다큐멘터리입니다. <더 킹>의 수상 이력은 2006년 필라델피아 영화제에서 미국 독립영화상(American Independents Award)이 전부입니다. 아무튼 영화를 보기 전에 대형 포스터에서 본 '선댄스'라는 단어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나름의 선댄스적인 느낌(?)과 기대감으로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포스터만 봤을 때는 다소 그로테스크한 영화가 아니겠냐는 생각을 했었는데, 실제 영화를 보니 이게 왠걸. 사건 자체는 끔찍하지만 플롯을 전개하는 방식, 그러니까 제임스 마쉬 감독이 의도하는 시선은 스릴러나 전형적인 복수극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끔찍한 사건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서정적인 배경음악을 때때로 사용하면서 특별히 긴장을 조성하는 일 없이 담담하게 흘러가는 영화가 <더 킹>입니다. <더 킹>이 독특한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 신화에서 가져온 듯한 비극적인 내러티브나 일종의 복수극이라 할 수 있는 사건의 전말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연출의 태도입니다. 그런 태도를 취하게 된 연출자의 의도가 무엇이겠느냐에 따라 <더 킹>은 완전히 다른 영화로 이해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미국의 중상류층 가정이 누군가에 의해 끔찍한 일을 당한다는 설정은 이미 여러 작품들 속에서 다뤄져 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특히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1991년 흥행작 <케이프 피어>는 가족을 위협하는 존재(로버트 드 니로)에 의해 어린 딸(줄리엣 루이스)이 농락을 당한다는 점에서 <더 킹>과 좋은 비교가 될만 합니다.

<케이프 피어>의 화법은 전형적인 복수극입니다. 자신에게 억울한 옥살이를 시킨 장본인(닉 놀테)에 대한 복수심은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 맥스 케이디의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그리고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전시됩니다. 그러나 <더 킹>에서 엘비스(가엘 가르시아 베르날)는 어머니와 자신을 버린 생부에 대한 복수심이 드러나지 않는 인물입니다. 중상류층 백인 가정 앞에 나타난 낯선 히스패닉계 젊은이의 존재는 그 자체로 미국 내 계층 간의 갈등을 내포하기도 하지만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의 원초적인 동시에 천진한 이미지가 그런 요소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백인 남성이 젊은 시절에 히스패닉계 여성을 농락하고 아이까지 낳게 한 다음 냉정하게 버렸다는 설정은 <더 킹>에서는 그저 등장 인물들의 개연성 높은 과거사일 뿐, 그 자체로 사회 갈등이나 국가간 갈등을 중심 주제로 다루기 위한 상징성을 갖고 있지는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엘비스의 일거수 일투족은 그 나이 남성이라면 의례 그럴 법한 수준일 뿐 특별히 범죄자의 위험성을 드러내 보이지를 않고 있다는 것이 <더 킹>의 플롯이 갖는 독특함입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자신의 생부를 찾아온 일, 교회에서 만난 어린 소녀를 사랑하는 일, 갑자기 치밀어오른 분노로 손에 잡히는 대로 흉기를 휘두르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단란한 가정의 일원이 되기를 소망하는 일 정도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영화 속의 인물에게서 기대하게 되는 만큼의 특별한 수준은 아닙니다. 엘비스는 박봉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피자집 배달과 청소 일을 하는 성실함의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자기 욕망에 충실하고 그 앞을 가로막는 위협에 대해 단호하다는 정도가 엘비스가 보여주는 치명적인 점입니다. 그 치명적인 점 때문에 결과적으로 엘비스의 생부(윌리엄 허트)가 이루고 있던 가정과 사회적 지위는 완전히 풍지박살이 나지요. 마치 주어진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는 터미네이터 같은 싸이코패스 캐릭터가 엘비스가 아니냐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그런 냉정함이 다름아닌 자신의 생부로부터 물려받은 DNA라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들이 사냥 도구를 통해 화해를 시작한다는 부분도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과거의 잘못를 잊고 목회자가 된 데이빗(윌리엄 허트)은 어느새 성장한 사생아가 나타나자 "그 죄는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건 이창동 감독의 <밀양>(2006)에서 신애(전도연)의 뚜껑을 열어젖힌 유괴 살인범 도섭(조영진)의 대사와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요. "저는 이미 다 용서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다 용서하셨습니다." <더 킹>은 사생아 킬러 엘비스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작품이지만 사실상 부각되고 있는 것은 데이빗의 위선과 자기 합리화하는 과정입니다. 엘비스의 입장에서는 결과적으로 복수극이 되고 있지만 데이빗의 입장에서는 철저한 죄 값 치르기의 과정이 되는 이야기가 <더 킹>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씨퀀스는 시냇물 흐르는 듯 하던 영화 전반과 달리 비교적 긴장감이 넘치는 편인데 집에서 결국 큰 일(?)을 저지르고 어디론가 차를 몰고 가던 엘비스가 도착한 곳은 다름아닌 생부의 교회였습니다. 교회에서 홀로 일을 하는 생부를 엘비스가 과연 어찌할 것이냐가 이 영화와 관객들에게 남겨진 마지막 숙제였는데 <더 킹>의 결말은 영화 전체를 정리해주는 중요한 열쇠가 되고 있습니다. 영문 포스터의 헤드 카피인 "The Devil Made Me Do It"는 데이빗의 처지에서 보자면 엘비스를 조종한 것은 악마가 아니라 오히려 정의와 심판의 하나님이었던 것이 아니냐는 생각마저 듭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리를 하자면, <더 킹>은 엽기적인 복수극의 설정과 줄거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주인공 엘비스에게서 복수의 의도성을 제거함으로써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가 아닌 상당히 사색적인 영화가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이기에는 아무런 악의가 없어보이는 엘비스의 모습 때문에 엘비스의 행동을 실제로 이끌어간 것은 심판의 하나님일 수도 있고 비극적인 운명 그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더 킹>은 위선적인 미국식 개신교와 미국이라는 국가의 처세술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영화이거나, '죄와 벌'이라는 고전적인 주제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인류보편의 작품으로 해석되어질 수도 있는 등 다양한 재해석이 가능한 작품입니다. 자기 잘못은 모르고 툭하면 '사탄의 무리들'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시는 분들이 꼭 좀 보셔야할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테고요. 영화 전반의 의도를 파악하는 키는 결국 마지막 장면에 있다는 것이 최근에 자주 경험하고 있는 바인데, 그런 점에서는 <더 킹>도 예외가 아닙니다. 데이빗을 찾아가 자기 죄의 용서를 구하는 엘비스의 마지막 모습은 결국 데이빗 자신이 자기가 믿는 신 앞에서 행했던 '간편한 자기 죄 사함'에 다름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