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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홀로 잠들고 싶지 않아] 홀로 잠들고 싶지 않은 모두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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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잠들고 싶지 않아 (I Don't Want to Sleep Alone)
차이밍 량 감독, 2006년

‘혼자’라는 말은 어쩐지 처량한 느낌이 있다. 혼자 밥 먹기, 혼자 영화보기, 혼자 놀기. 제 아무리 혼자 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라도 순간순간 자기도 모르게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함께 어울린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영화를 보고, 함께 노는 순간만큼은 ‘혼자’가 아니기에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아무리 사람들을 만나 함께 있는다고 하여도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로움은 언제나 우리가 혼자가 되는 순간만을 기다리며 우리 곁을 맴돌고 있다. 우리는 함께일 때라도 잠재적 외로움의 가능성을 지닌, 언제나 외로운 사람들이다.

“홀로 잠들고 싶지 않아.” 차이밍 량의 이 영화는 제목부터 외로움이 절절히 묻어난다. 그의 전작인 <흔들리는 구름>이 노골적인 성적 묘사로 화제가 되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홀로 잠들고 싶지 않아>라는 제목에서 은근한 성적인 연상을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서 ‘잠’은 그런 성적인 의미보다는 보다는 피할 수 없는 고독의 순간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잠은 바쁜 일상을 마무리하는 하루의 끝인 동시에 또 다른 일상을 준비하기 위한 시작이며, 또한 우리가 온전히 ‘혼자’가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누군가와 함께 자더라도 ‘잠’에 빠져 있는 순간만큼은 우리는 함께 있음을 느낄 수가 없다. 홀로 잠들고 싶지 않다는 것은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외롭고 싶지 않다는 표현과 다름없다. 인간의 고독과 소통의 문제를 다뤄온 차이밍 량으로서는 그와 가장 어울리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말레이시아를 배경으로 자신의 페르소나인 리캉생과 함께 인간의 피할 수 없는 고독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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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된 건물이 있다. 건물을 짓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철거 중인지 알 수 없는 건물이다. 앙상하게 남은 건물을 힘겹게 받치고 있는 철골 구조가 그대로 드러나는 건물의 풍경은 황량하기 그지없다. 그 건물 가운데를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물이 채우고 있다. 끊임없이 배수기를 통해 물을 퍼내지만 물은 바닥을 내보일 생각은 없이 건물을 비추는 하나의 빛이라도 먹어 삼킬 듯 어두운 빛을 드러내고 있다. 폐허가 된 건물이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의 모습이라면, 그 속에 가득찬 물은 피할 수 없는 외로움의 심연과도 같다. 이 스산한 건물의 풍경이 등장할 때만큼 영화의 정서가 가장 잘 드러나는 순간은 없다. 그 건물 속에서 외로움에 사로잡힌 남녀는 섹스를 시도한다. 하지만 거대한 산불로 인한 연기가 온 도시를 가득 채운 나머지 둘은 서로 입맞춤도 제대로 하지를 못하고 그새 쓰러지고 만다. 그 순간 남자를 원하는 또 다른 외로운 여자는 미로 같은 건물 속을 헤매다 건물 바닥에 고여 있는 검은 물에 빠지게 된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그녀가 마주하게 된 것은 어떻게 하여도 외로움에서 도망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남자가 다쳐서 거리에 쓰러져 있을 때 그를 데리고 와 정성으로 보살핀 또 다른 남자는 그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에 그를 찾아가 그를 죽이려고 한다. 하지만 끝내 그를 죽이지 못하고 울음을 내보인다. 그를 죽이는 순간 남자는 또 다시 혼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 이들은 이토록 지독한 외로움에 빠져 있는 것일까? 그건 어쩌면 이들이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현대사회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적인 삶은 자연스레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게 된다. 적은 시간에 최고의 효용을 내기 위해 사람들은 점점 자기가 맡은 일에만 충실하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타인과의 협력은 다같이 모여 노래를 부르며 농사를 짓던 시대의 협력과는 차원이 다르다. 영화에는 희미하지만 이런 자본주의 산업화의 흔적들이 군데군데 묻어난다. 남자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거리의 부랑아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거리를 헤매게 된다. 그렇게 혼자가 된 그를 데리고 와 간호하는 또 다른 남자는 외국에서 온 노동자다. 그들이 매트리스를 들고 폐허가 된 건물로 가면서 그들은 온갖 다국적 기업들의 광고가 화려하게 장식된 고가도로 밑을 건넌다. 그 거대한 고가도로 밑을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것은 산업화가 완성시킨 현대사회의 풍경이 그들을 질식하게 만드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점점 새로운 것을 원하고 순간의 즐거움을 찾게 되는 현대사회이기 때문에, 그들이 끝내 타인과의 소통을 이루어내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지독한 외로움에서 벗어나고만 싶은 나머지 그들의 소통은 자꾸 어긋나기만 한다. 그래서 남자가 자신을 원하는 또 다른 여자를 만나 섹스가 아닌 자위를 해주는 장면이 낯 뜨겁기보다는 안쓰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차이밍 량이 스크린 위에 펼쳐내는 이 지독한 외로움의 세계를 두 시간 동안 버티고 보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것만큼이나 쉽지가 않다. 그러나 친절하게도 그는 영화의 마지막에 마법과도 같은 기적을 우리에게 선사해준다. 폐허가 된 건물을 채우고 있던 그 검은 물 위로 천천히 매트리스가 내려오기 시작한다. 그 위에는 남자가 자신을 간호해준 또 다른 남자와 자신이 쫓아다닌 여자가 함께 누워있다. 세 사람의 표정에는 영화 내내 볼 수 없었던 평온함이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음악이 흘러나온다. “나는 당신 마음에 기대고 싶어요, 당신만이 오로지 내 마음을 알아주잖아요.” 홀로 잠들고 싶지 않던 이들은 그렇게 결국 함께 잠이 든다. 시종일관 대사도 없이 롱테이크로 이뤄진 화면들로 무미건조함을 전해주던 영화는 이 장면 하나만으로 우리들의 외로움을 위로하는 가장 따뜻한 영화가 된다. 현대사회의 고독을 다룬 영화는 많지만, <홀로 잠들고 싶지 않아>처럼 가슴 뭉클한 위로를 전해주는 영화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건 오로지 차이밍 량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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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1. 거리의 남자를 연기하는 리캉생은 식물인간이 된 남자도 동시에 연기를 하고 있다. 어쩌면 영화 속에서 언제나 혼자인, 가장 외로운 존재는 바로 그 식물인간 남자일 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동안 어쩌면 이 영화는 침대에 누워 꼼짝도 못하고 있는 저 식물인간의 꿈이 아닐까도 생각해봤다. 평생을 혼자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위한 위로마냥 꾸는 꿈처럼 말이다.

덧2. <홀로 잠들고 싶지 않아>는 6월22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계속되는 제2회 대만영화제에서 만날 수 있다. 21일 토요일 4시30분에 상영이 예정되어 있다. 이 작품 외에도 차이밍 량의 또 다른 걸작 <안녕, 용문객잔>을 비롯하여 지난 해 세상을 떠난 에드워드 양의 작품들과 대만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허우 샤오시엔의 작품들, 그리고 리안 감독이 헐리우드에 진출하기 이전에 발표한 작품들을 함께 만날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서울아트시네마 홈페이지(http://www.cinematheque.seoul.kr)를 참고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