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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아바타] 벌거벗은 임금님의 위풍당당 행진곡

아바타
감독 제임스 카메론 (2009 / 미국)
출연 샘 워싱턴, 조이 살디나, 시고니 위버, 스티븐 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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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시각적 쾌락의 유통기한은 얼마나 될까.
시계를 돌려 영화의 탄생 시점으로 돌아가 보자.
수전 손택은 <영화의 한 세기>라는 글에서 “모든 것은 백 년 전 그 순간, 기차가 역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라고 썼다.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을 처음 본 사람들은 모두 소리를 지르며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기차가 정말로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용’ 또는 ‘예술’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형식’ 또는 ‘체험’이었고, 곧 ‘현상’이었다.
이 새로운 ‘매체’에 누군가는 신경증적으로 반응했고, 누군가는 열광했다.
<재즈 싱어>로 영화에 처음 ‘소리’가 도입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새 시대가 열렸다’며 환영했고, 누군가는 이미지의 시적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행위라며 우려하고 저항했다.
새로운 ‘형식’이 등장할 때마다 필연적으로 이어진 긍정과 부정의 팽팽한 긴장을 거름 삼아 영화는 정반합의 눈부신 도약을 이뤄왔다.
(물론 손택처럼 가장 좋은 영화는 모두 무성영화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한 평론가도 있지만)

<아바타>를 1895년 영화의 탄생, 1927년 유성영화의 탄생에 버금가는 ‘혁명’으로 평가하는 입들이 많다.
그러나 ‘21세기 디지털 혁명’이니 ‘영화의 미래’니 ‘대세’니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미심쩍고 거북살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아바타>에는 새로운 ‘매체’가 등장했을 때 으레 따르게 마련인 극렬한 찬반양론이 없다.
관객들의 반응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카데미보다 예술성에 좀 더 치중한다는 골든글러브가 이미 알토란 같은 작품상과 감독상을 고이 바쳤고, 네이버의 소위 ‘전문가’ 평점은 9점이 넘는다.
(물론 ‘투사’ 정성일 씨가 이미 장문에 걸쳐 <아바타>의 하잘것없음을 ‘폭로’하는 글을 기고했다. 속 시원했지만, 압도적 찬사 속에 그 반향은 미미하다.)
이 모든 것은 <아바타>가 이의의 여지가 없을 만큼 압도적이고 완벽한 영화임을 증명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이 영화가 무언가 논쟁해야 하고, 해석해야 하고, 진지하게 다뤄야 할 텍스트로서 아무런 가치도 없음을 반증한다.
우스운 것은,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끊임없이 그럴듯한 ‘의미’를 찾아내려는 시도들이다.
그런 평을 접할 때마다 나는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는 듯 민망한 기분이 된다.
예컨대 가장 흔한 비평적 찬사는 <아바타>가 3D 기술을 전시하고 과시하기 위해 ‘이야기’를 희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바타>의 이야기는 기실 아메바가 시나리오를 쓴 듯한 <트랜스포머>와 별로 다르지 않다.
‘자연=원시=원주민=선 대 기계=문명=침입자=악’이라는 전형적인 선악대결 구도는 (어떤 의미에서) ‘좋은 기계’라는 새로운 가능성(물론 <터미네이터>가 있지만)을 보여준 <트랜스포머>의 그것보다도 더 구태의연하고 평면적이다.
선악으로 나뉜 캐릭터는 끝까지 제 위치에 머무르며, 심지어 극 초반 주인공 제이크에게 질투 섞인 반응을 보이며 무언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처럼 굴던 ‘또 다른’ 아바타도 특별한 이유 없이 어느새 자기 목숨까지 희생하는 충실한 동료가 되어 있다.
‘여전사’라는 게 단순히 ‘싸움을 하는 여자’라는 의미가 아니라면, 이 영화의 여주인공 또한 결국 여전사라기보다는 힘 센 남자 옆에 병풍처럼 다소곳이 선 들러리 역할에 그치고 만다.(이 대목에서 김혜수가 했다는 그 전설적인 말-“겉모습이 촌스러운 건 용서가 되지만 마인드가 촌스러운 건 용서할 수 없다.”-을 해주고 싶다.)
제이크에게 격렬한 반감을 드러내보이던 나비족 차기 족장이 토루크막토를 길들여 나타난 제이크에게 ‘쿨하고 시크하게’ 제 자리를 넘겨주며 서둘러 갈등이 봉합되는 순간은 코웃음이 나올 정도로 시시하다.
반대로, 이 영화의 서사적 밀도를 높이 사는 평자들은 왜 이 영화가 2시간 40분이나 되어야 하는지 ‘해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예 언급하지 않거나 영화의 내적 동인만으로는 설명하지 못한다.
이 놀라운, 이야기와 캐릭터의 평면성과 그에 비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긴 러닝타임이 ‘3D 기술을 전시하고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기술적 완성도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라는 변명 또한(감독이 해야 할 변명을 평론가들이 대신해 주는 것도 꼴사납지만) 옹색하기 짝이 없다.
이야기와 캐릭터의 입체성과 이미지의 입체성이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라고 누가 말했나.
그것은 제임스 카메론의 ‘선택’일 뿐이다.

여기서 한 술 더 뜬 비평적 해석은 수정주의 서부극 또는 정치적으로 온당한 블록버스터 운운하는 것이다.
이 영화를 미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하는 서브텍스트로 읽는 건 감독의 말을 고스란히 따라 하는 앵무새 같은 짓이다.
(압권은 <로고스와 뮈토스의 변증법적 결합으로서 ’아바타’>라는 동아일보 기사다. 푸하핫!)
도대체 뇌를 잠깐 꺼내놓지 않고서야 “I'm king of the world!”를 외치던 뻔뻔하고 오만하고 야심에 가득 찬 남자의 말을 토씨 그대로 믿을 수가 있단 말인가!
설사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이 영화가 원주민이나 원시문명 또는 제3세계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제시했다고 해도, 표상은 표상일 뿐 실재는 아니다. ‘좋은 신화’는 ‘나쁜 신화’ 못지않게 나쁜 신화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사람들은 그냥 개가 짖나 보다 해도 된다.)

이 모든 ‘구라’보다는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롤러코스터 타듯 신나게 즐기고 나왔다는 관객들의 반응이 훨씬 ‘진실’에 가깝다.

그러나 그 관객들조차 ‘영화가 아니’라 마치 아이폰에 열광하듯 <아바타>에 열광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내가 너무 시대착오적인 것일까?
“마치 판도라 행성에 직접 들어갔다 나온 것 같다.”는 식의 감상은 그 자체로 3D의 태생적 한계를 웅변하는 것처럼 들린다.
관객의 말초신경을 더욱 효과적으로 자극하고 사고를 마비시키는 3D 기술은, 그것이 더욱 실감나면 실감날수록, 관객을 스크린 표면에 ‘봉합’하는 것을 넘어 아예 그 속으로 끌어들여 버린다.
‘대상으로부터 거리두기’, ‘스크린으로부터 거리두기’를 기본으로 하는 사유와 성찰은 영화에서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숱한 평자들이 그렇게 멍청한 의견들을 내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바타>를, 혹은 이를 위시한 ‘3D 영화’를 영화의 ‘미래’라고 떠벌리는 언론과 일부 평자들의 호들갑이 섬뜩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점점 사람들의 생각을 ‘마비’시키는 데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현 정부가 모종의 꼼수를 부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음모론까지는 나아가지 않겠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 순수한 시각적 쾌락의 유통기한은 얼마나 될까?
그것은 시신경으로 들어온 시각 정보가 대뇌피질에 도착할 때까지의 시간, 그야말로 ‘찰나’이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한 컷 한 컷은 어떠한 잔향도 남기지 않는다.
사람들은 한 장면이 지나가는 순간, 그리고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급격한 속도로 이 영화에 대해 잊어갈 것이다.
획기적인 신기술이 등장하면 이전 기술은 바로 구닥다리 취급받는 전자제품의 운명을, <아바타>는 스스로 선택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우리는 90년대 ‘시티폰’이나 ‘탱크 휴대폰’을 추억하듯, 농담처럼 이야기할 것이다.
아, 그런 후진 영화도 있었지.
(정성일 씨의 ‘후지다’는 표현이 까무러치게 좋아 잠시 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