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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부조리에 느끼는 무력한 불편함

우리들 대부분은 초라한 옷차림과 엉터리 가구들을 부끄럽게 여기지만, 그보다는 초라한 생각과 엉터리 철학을 부끄럽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 아인슈타인 -

명언이 명언인 이유는 현실의 세계에 적용하는 게 말도 못하게 어렵기 때문인가 보다. 어쩌면, 현실은 경구와 명언의 세계를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 끊임 없이 되풀이 되는 문장처럼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하고"만 있는지도 모르겠다.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현실과 경구의 세계,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옳은 가치와 즉물적인 현실 세계의 거리, 작가는 아득한 거리를 절망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속에 그려냈다.

 

소설과 완강하게 감겨도는 표지 그림, 시녀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표지에 나오는 벨라스케스Velazquez의 그림 <시녀들 Las Meninas>은 작가의 상상력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나 역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처음 보았을 때, 그림 오른쪽 아랫쪽의 시녀에게 먼저 눈길이 갔다. 다른 시녀들의 연령은 대략 왕녀보다 너덧살 정도 위로 보이건만 오른족 아래의 시녀는 나이도 들어 보이거니와 궁중 생활을 오래한 연륜이 느껴지기도 했으며,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시선과 다문 입이 마치 "이 왕녀의 방안을 들여다 보거나 왕녀를 알현하려면 일단 내 허락을 받아야 하오." 하는 듯한 완고한 권위가 느껴져서다.

한편으로는 왜소증 장애인인 시녀를 곁에 두어 어린 왕녀가 자기 눈 높이에서 마음껏 시녀를 부릴 수 있게 한 왕가의 비인간적인 배려가 신경이 쓰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녀에게서 콰지모도와 같은 비련의 헌신성이 엿보여 가슴이 아팠다.

또, 시녀라는 계급의 한계에 겹쳐 왜소증 장애인으로서 호화로운 궁궐에서 살면서 감당해야 했을 막막한 외로움과, 공포가 내재화되는 사이 고통과 상처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과정들을 상상하느라 꽤 불편한 심정이 되어버렸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는 내내, 표지 그림 속 시녀와 견고하게 겹쳐진 여자 주인공의 모습 역시 끈적한 불편함을 만들어냈다.

 

왜, 분노가 아니라 불편함일까?

곤란한 것은 화를 내야할 대목에서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눈물이 나거나 가슴이 저리거나, 연민을 느끼거나 하는 나였다. 왜 나는 요한이나 주인공 남자처럼 버럭 화를 내고 멱살을 쥐고 주먹을 날리는 대신 못나게 눈물을 질금거렸을까?

대답에 5초도 안 걸렸다. 나이를 먹으면서 숱하게 스스로를 중무장 시켰던 수많은 가치와 명언과 경구를 무기력하게 만들 만큼 오랜 상처가 내게도 남아 있었던 게다. 아직도 어릴적 들었던 '메주'니, '넌 키도 작고 얼굴도 못생겼으니 상업계를 가면 안 돼.' 라는 말들에 지배되고, 길을 가다 부딪히는 성형광고와, 길거리에 도배된 미녀들의 광고, 자고 나면 배달 되는 얼짱 스타들의 소식으로 세뇌 당하며, 내 스스로를 마모시켰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나이를 먹으면서 내 안에서 빛나던 전구의 필라민트가 수명을 다해간다는 자각을 거리를 걷는 젊고 발랄한 여성들을 볼 때마다 환기시켜준 결과다.

'부러워 하고 부끄러워 하는' 부조리의 연쇄를 암묵적으로 인정해버린 사람에겐 부조리한 숱한 현상을 피해서 비껴가는 센서가 활성화 된다. 센서가 활성화된 사람에겐 부당하다는 인식 보다는 움츠리는 반응이 훨씬 재빠르다.

 

작가의 말 대로 '부러워 하고 부끄러워 하는'사람들이 넘쳐나는 시대엔 부조리를 제기한다는 게 이단아의 헛발질일 수도 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스무살 주인공의 운명은 이단아를 냉대하는 세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때문에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로 작가가 못생긴 여성들에 선물을 안겼다는 카피는 좀 안쓰럽다. 선물이라기엔 처방에 담긴 사랑은 연약하며, 세 가지 엔딩 역시 어느 쪽으로도 해피하지 않다. 하지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작가가 관심을 두고 그린 마이너리티 세계인의 또 하나의 초상으로 남기기엔 충분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