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 theater

패스트푸드 네이션 (Fast Food Nation, 2006)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예전에 <슈퍼 사이즈 미>(2004) 라는 화제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었죠. 감독인 모건 스펄록 자신이 직접 실험 대상이 되어 맥도날드와 같은 정크 푸드의 유해성을 고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루 세 끼니를 전부 맥도날드 세트 메뉴, 그것도 '수퍼사이즈 옵션'으로 계속 먹다보니 체중이 증가하고 머리털이 빠질 뿐만 아니라 급기야는 우울증과 같은 스트레스성 증세까지 보이게 되더라는 거였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저에게 실패한 작품이었습니다. <슈퍼 사이즈 미>를 보는 동안, 그러니까 주인공이 빅맥 세트 메뉴를 먹는 장면이 나오고 또 나오는 동안 저는 햄버거가 정말 먹고 싶었습니다. 아마 그 날 저녁 끼니를 제대로 못먹고 영화를 봤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햄버거와 같은 정크 푸드는 제발 먹지 말라고 설득하기 위해 만든 영화를 보며 도리어 햄버거와 후렌치 프라이와 콜라가 먹고 싶어지다니요. 주인공이 스스로에게 행한 '수퍼사이즈 실험'과 그 결과도 빅맥 세트로만 약 한 달 가량의 식사를 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조건 하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증상이란 생각이 들었으니 논리적인 면에서도 <슈퍼 사이즈 미>는 완전한 실패였습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리차드 링클래이터 감독의 <패스트푸드 네이션>도 일종의 프로파간다 영화입니다. 정크 푸드의 영양학적인 문제점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극 영화의 형식을 빌어 그 주변부의 풍경을 관통하고 있는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합니다. 미키스(Mickey's)라는 가공의 패스트푸드 회사와 그 중역들이 나오고, 수 만 마리의 소를 사육하고 가공하는 정육 공장의 살풍경이 등장하며, 그곳에서 일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도보로 국경을 넘는 멕시코인들과 이런 상황에 분개하여 행동하는 젊은 학생들도 등장합니다. 그러나 한 편의 드라마로서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한 편입니다. 세련된 화법을 구사하기 보다는 이제는 그리 새롭지도 않은 장면들과 수많은 대화들을 담아내기 위해 전력하는 영화라고 할까요. 문제는 극적인 효과를 위해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담기만 한다는 점입니다. 더군다나 어떤 대화 씨퀀스는 지나치게 길기만 해서 집중력을 유지하기가 힘들기까지 합니다.

리차드 링클래이터 감독의 입장을 가장 가깝게 대변하는 인물은 피트(에단 호크)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앰버(애쉴리 존슨)에게는 약간 돈키호테적이면서도 정의감에 넘치는 삼촌으로서 용기와 조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만든 <패스트푸드 네이션>은 어쩌면 앰버와 다른 학생들이 벌이는 '소떼 방출 계획'처럼 치기 어린 노력으로 끝나버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울타리를 열어줘도 밖으로 나오지 않는 소떼들처럼 영화 관객들의 각성이라는 것은 무작정 정보를 전달하기만 한다고 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막판에 비장의 무기처럼 공개되는 정육 공장의 도살 장면은 이 영화를 18세 이상 관람가로 만든 주 원인이 될 만큼 노골적이지만 불행하게도 이 영화가 목표로 하고 있었던 바와는 그다지 효과적으로 연결되지를 못하고 맙니다. 정크 푸드를 사먹지 말라는 얘기인가요? 아예 육식을 끊으라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면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사는 것이, 특히 멕시코인들의 처지가 처참하게 도살 당하는 소와 같은 신세라는 건가요? 실비아(카탈리나 산디노 모레노)의 눈물은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건 지나친 비약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리차드 링클래이터 감독의 영화니까 적어도 실망할 일은 없으리라고 했었는데 한 편의 영화로서 상당히 지루한 작품이었습니다.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원작 <패스트푸드의 제국>(Fast Food Nation: The Dark Side of the All-American Meal, 2001)의 작가 에릭 슐로서가 제작과 공동 각본을 맡으면서 드라마의 구축 보다는 사실의 전달에 촛점을 맞춘 작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약 마이클 무어가 같은 내용으로 영화를 찍었다면 실제 관련 인물들을 인터뷰하는 다큐멘터리가 되었을테지요. 극 영화이지만 노골적인 선전선동을 앞세운 다른 작품으로는 <로스트 라이언즈>(2007) 를 언급할 수 있겠네요. 그러나 등장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직접적인 메세지 전달과 계몽을 목표로 한다는 점은 같지만 <로스트 라이언즈>는 배우들의 연기와 밀도 높은 연출로 크게 지루함을 느낄 수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패스트푸드 네이션>이 지루함을 상쇄시키기 위해 동원한 전술은 정말 끊이지 않고 등장하는 유명 배우들의 릴레이식 출연입니다. 비교적 주연급이라 할 수 있는 그렉 키니어, 카탈리나 산디노 모레노, 윌머 발레라마를 시작으로 패트리샤 아퀘트, 폴 다노,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블루스 윌리스, 에단 호크에 급기야 캐나다 출신의 록가수인 에브릴 라빈까지.

생각해보면 리차드 링클래이터의 영화라곤 <비포 선라이즈>(1995)와 <비포 선셋>(2004), 그리고 <스쿨 오브 락>(2003)을 본 것이 전부였네요. <패스트푸드 네이션>은 언제든지 동의해줄 수 있는 내용이고 용기백배하는 연출 의도에는 박수를 보내주고 싶지만 영화 자체는 정말 별로였습니다.  리차드 링클래이터 감독은 전반적으로 높은 완성도의 영화를 만든다기 보다는 자신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부분에만 집중하는 타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불어 <스캐너 다클리>(2006) 보다도 먼저 만들어진 영화임에도 미국 쇠고기 수입 재개와 광우병 문제가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된 이 시점을 틈 타 개봉을 한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안타깝게도 <패스트푸드 네이션>은 광우병 문제까지 다루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 보다는 비위생적이고 비인간적인 동물 사육과 도축 과정을 통해, 그리고 이를 용인하는 미국인 다수의 목소리(브루스 윌리스)를 통해 자본의 논리와 미국 사회의 병폐를 비판하는 데에 집중합니다. 그다지 새롭지도 않는 이야기입니다만 이에 관한 레퍼런스 영화로서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체제와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암묵적으로 용인하거나 대안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 대중들의 모습을 강조했더라면 한발짝 나아간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울타리를 열어주어도 뛰쳐나갈 줄을 모르는 소떼들의 모습이 아마도 그런 은유가 아니었나 싶긴 하네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Richard Linklater, director @ Fast Food Nation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