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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배창호 특별전] '꼬방동네 사람들'을 보다 문득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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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방동네 사람들
배창호 감독, 1982년 작품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영화만큼은 달랐다. 영화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지만 정작 한국영화에 대해서는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세계영화사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더 알아보려고 책도 뒤지고 인터넷도 찾아다녔지만, 막상 한국의 영화사에 대해서는 알아보려고 하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배창호 감독님의 특별전이 열린다는 이야기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고래사냥>이나 <깊고 푸른 밤>은 어릴 적 TV를 통해 본 적이 있지만 그때는 너무 어렸을 뿐더러 그 영화들이 대단한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고, 그 이후에도 배창호 감독님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막연하게나마 유명한 분이라는 생각만 했지 정작 작품세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었다. 이번 특별전을 통해 조금이나마 감독님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가 있었다. 아직 봐야할 감독님의 작품이 많이 남아 있어서 감독님의 영화가 어떻다고 확실하게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다만 지금까지 본 작품들(<꼬방동네 사람들>, <황진이>, <정>)에서 일관되게 보이던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나 헌신적인 사랑의 모습들은 비록 나의 취향과는 맞지 않음에도 보는 이의 마음에 깊이 새겨지는 힘을 느낄 수 있어서 이것이 감독님의 작품들이 지닌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지난 주 화요일에 열린 개막식에서는 감독님의 데뷔작인 <꼬방동네 사람들>이 상영되었다. 서울아트시네마의 관객석 대부분이 영화인들로 가득 찼었는데, 지금까지 서울아트시네마를 가면서 처음 본 낯선 풍경이었다. <꼬방동네 사람들>에 주연으로 나온 배우 김희라 선생님과 김보연 씨를 비롯하여, 감독님의 특별전을 기념하기 위한 단편을 만든 윤성호 감독과 양해훈 감독, 그 외에도 배우 이정재 씨를 비롯해 정말 많은 영화계 사람들이 모여 오랜만에 서울아트시네마는 어쩐지 훈훈한 분위기까지 감돌았다. 영화는 20년도 더 지난 영화이기에 지금 보기에는 조금 유치한 장면도 없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상하게 보고 나면 가슴이 찡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집집마다 화장실도 없어서 공동 화장실을 이용하는 조그만 달동네에서 구멍가게 하나로 돈을 벌고, 말도 듣지 않는 아들과 만날 술만 마시는 남편을 데리고 힘겹게 집안 살림을 겨우 꾸려나가면서, 그 와중에 그 동안 소식도 없다가 갑자기 나타나 아들을 내놓으라는 전 남편까지 상대하게 되는 주인공 명숙(김보연)의 삶은 비루하기 짝이 없는 삶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삶 속에서도 오히려 자신보다 더 못한 처지의 이웃을 달래며 꿋꿋하게 살아간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강인한 생의 의지를 갖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 삶에 대한 의지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영화를 본 다음 날 꿈에까지 꼬방동네의 사람들이 나올 정도였다. 또 영화는 명숙의 두 남편, 태섭(김희라)과 주석(안성기)마저도 비열하기보다는 인간적으로 그려놓고 있어서, 어떤 사람도 악하지 않다는 이 끝없는 긍정적인 태도에 나 역시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극 중 목사님을 통해 전하는 종교적인 메시지가 조금은 낯간지럽게 느껴지긴 하였지만, 그런 것들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오히려 영화 속 등장인물들에 대한 애정이 더욱 생겨나게 하는 영화였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문득 영화 속의 저 풍경들이 이미 사라져버린 지금도 이 영화의 정서를 이해하는 게 가능할까 생각하게 되었다. 생각의 발단은 내 옆에 앉아 있던 두 명의 관객 때문이었다. 나보다는 나이가 어려 보였던 그 두 남성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누추하기 짝이 없는 달동네의 풍경이 마냥 신기했던지 두 사람은 영화를 보는 내내 과연 저런 곳이 어디 있을지 진지한 토론을 하였고, 철로 가에서 아이들이 노는 장면에서 기차가 아닌 지하철이 지나갈 때는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고 보면 영화 속에 담긴 24년 전 서울의 풍경들은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낯선 풍경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요즘 시대에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빨래를 하는 풍경을 보는 건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택시 드라이버>에서 트래비스가 택시를 운전하는 동안 스쳐지나가는 뉴욕의 거리에서 느낄 수 있었던 삭막한 분위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서울 시내의 밤거리마저도 지금으로서는 낯설기 그지없다. 물론 옛날 영화이기 때문에 지금 시대에는 사라져버린 풍경에서 느끼는 낯설음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 사회의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른 나머지 그 낯설음의 간극이 점점 좁아지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낯설음이 단지 유치하고 촌스러웠던 옛날로만 기억되는 것 같아 아쉽다. 영화 속 달동네 풍경이 아무리 낯설어 보이더라도 그건 20여 년 전 서울 곳곳에서 볼 수 있었던 풍경임에는 틀림이 없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 시대의 기억들을 가슴 속에 안고 살아가고 있다. 나 역시도 달동네에서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하게 다닥다닥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인 동네에서 살았고 또한 그런 달동네를 직접 눈으로 본 적도 있기 때문에 영화의 정서에 나름 공감할 수 있었다. 그 꼬방동네의 남루한 풍경이 낯설고 촌스럽기보다는 그저 가슴 아프게만 느껴졌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살았던 그 동네에는 으리으리한 고층 아파트 건물만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그 시절의 풍경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말았다. 남대문 시장의 그 촌스러운 풍경에서도 어린 시절 엄마 손 붙잡고 재래시장을 돌아다니던 기억이 새삼 떠올라 왠지 모를 가슴 아련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마트의 풍경이 더 익숙한 세대들은 과연 이 영화의 장면들에 공감을 느낄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꼭 이 영화에 담긴 풍경들이나 정서에 대해 공감을 느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낯선 장면들을 낯선 것으로만 받아들이지만 않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해가는 지금 사라져버린 것들은 그것을 추억할 새도 없이 너무 쉽게 유치하고 촌스러운 기억으로만 남아 사람들에게 단지 웃음거리로만 남게 되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90년대의 뮤직비디오를 보며 그 유치함에 웃고, 그 시절의 가장 유행했던 패션을 보며 촌스러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만큼 사람들은 사라져가는 것들을 쉽게 잊고 있는 것이다.

개막식에서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하였다. 여든을 눈앞에 두고 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신작을 여전히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배창호 감독님의 영화도 그렇게 세월이 흘러서까지도 사람들의 기대를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감독님의 지나간 영화들을 잊지 않고 끊임없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배창호 감독님의 특별전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래서이다. 또한 내게 이번 특별전은 스스로에게도 무엇을 잊고 살았는지, 무엇이 사라져갔는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기회가 될 것 같다. 덕분에 요즘 서울아트시네마를 갈 때마다 오랫동안 잊고 지낸 친구를 만나러 가는 듯한 정겨운 기분이다. 아마도 특별전이 끝날 때까지 이 기분만큼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by 인생의별, 08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