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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너를 보내는 숲] 당신은 살아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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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보내는 숲 (殯の森)

가와세 나오미 감독, 2007년 작품


“나는 살아있습니까?”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쓸쓸한 표정으로 묻는다. 그러자 스님이 대답한다. “살아있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밥을 먹고 반찬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가요? 밥은 드시고 계신가요? 반찬도 맛있습니까? 이건 중요한 겁니다. 또 다른 하나의 의미는 ‘왠지 살아있는 기분이 들지 않아, 살아있는 의미를 모르겠어, 살아있는 목적을 모르겠어’라고 말할 때입니다. 이건 아까 얘기한 것과 다른 이야기입니다.” 스님은 살아가는 목적을 잃었을 때는 그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서 자신을 잡아줄, 자신에게 따스한 말을 건네줄 누군가가 있음을 실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요, 만약 옆에 자신을 잡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누군가가 묻자 다시 스님이 대답한다. “그것이 문제이지요. 혼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현대인에게 주어진 상황이니까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주고받게 되는 상처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있을까? 그리고 그 상처로 인해 멀어지는 관계만큼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지거나, 친구와의 사이가 데면데면해질 때마다 느끼는 외로움은 물론이고, 소중했던 사람이 자신의 결을 떠났을 때 느끼는 슬픔과 허전함이 우리 마음에 남기는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누군가가 그 허전한 빈자리를 채워주길 바란다. 누군가가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기를 바란다. 에릭 쿠의 <내 곁에 있어줘>와 미란다 줄라이의 <미 앤 유 앤 에브리원>은 그런 상처의 치유 과정이 잘 그려져 있었기 때문에 감동적이었다.


가와세 나오미의 <너를 보내는 숲>에서도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온다. 아이를 잃어버린 아픔을 간직한 마치코(오노 마치코), 그리고 그녀가 치매 노인이 있는 요양원에서 만난 시게키 할아버지(우다 시게키)가 바로 그들이다. 두 사람이 함께 33년 전 죽은 시게키 할아버지의 아내의 무덤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는 <너를 보내는 숲>은, 서로를 위로하는 이야기에서 나아가,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좀 더 근본적인 관점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고통이란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두 사람은 여정 속에서 서로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지 않는다. 대신 두 사람은 여정 속에서 서로 살아있음의 의미를 찾아간다. 살아있다는 것, 다시 말해 존재의 의미는 스님의 이야기대로 자신을 잡아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 자신에게 따스한 관심을 보여줄 누군가가 있음을 뜻한다. 길을 잃고 산 속을 헤매던 도중, 갑자기 내린 비에 조그만 냇가의 물이 불어나 마치코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시게키 할아버지는 그런 마치코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갈 길을 가려고 한다. 그러자 마치코는 갑자기 서러울 정도로 소리 내어 울면서 시게키 할아버지에게 제발 돌아오라고 애원을 한다. 그녀의 눈물을 본 시게키 할아버지는 그제야 그녀에게 다가가 미안하다고 말을 한다. 그날 밤 마치코는 추위에 정신을 잃고 몸을 떨던 시게키 할아버지를 마치코는 자신의 몸으로 따뜻하게 해준다. 그렇게 같이 있다는 것, 그것이 두 사람에게는 커다란 위로이며 또한 살아있음의 증거였다.


삶이 견뎌내기도 어려울 정도로 커다란 상처를 안고 있는 마치코와 시게루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혼자서 살아가야만 하는 현대인인 우리들이 외로움이라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익숙해진 외로움을 잊기 위한 수단으로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살아있음에 대한 고민보다는 그저 그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서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혼자라는 사실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너를 보내는 숲>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살아있습니까? 당신 곁에는 당신을 잡아줄, 당신에게 따스한 관심을 보여줄 누군가가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