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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home

때 맞춰 내리는 비(2009, 허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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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를 봤을 때 나는 사실,

이십대 초반이었는데도 그 영화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 무렵이나 지금이나

연애코드나 사랑이야기는 나랑은 좀 동떨어진 것이라서

그에 대한 감수성이나 이해력이 떨어지니까.


사랑은 선천적이거나 운명적인 것이라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사랑이야말로 모던화되고 사회적으로 학습된 관념이다.

그렇다고 사랑이 인연이고 운명이라는 사실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나에게도 가능한 일이라고도 믿지도 않는다.


곁다리 이야기는 이쯤하고,

<봄날이 간다>가 잊히지 않는 건

비가 때 맞춰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음을

<호우시절>을 보고서야 나는 늘 그렇듯 뒤늦게야 깨달았다.

하지만 청춘이나 사랑, 삶이란 것은 사실 그런 것이니까

나는 내 삶의 템포대로 세상과 박자를 맞추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스타 파워에 휘둘려 리듬을 놓친 듯한 <외출>은

한국 영화에서 발견하기 힘든,

한국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몇 조각의 풍경에 감탄한 기억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다른 때에 만나면 사랑하게 된다고 나는 믿지 않으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 때이기 때문이고

우리가 지금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왕가위 영화의 대사처럼 '때가 아니기 때문'임을 아니까.

그리고 우리가 그 때를 다시 만나기란 무척 어렵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래도 <호우시절>은 여주인공처럼,

두보의 시와 두보초당처럼 차분하고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때를 만나 다시 사랑하게 된 연인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허진호 감독 자신이 제 짝을 찾아 삶의 안정기에 들어섰기 때문일 테지.


한 사람의 삶에, 아니 한 시대와 한 세계에

때를 알아 좋은 비가 내리는 것일까.

아니면 이제 애타는 청춘도 흐르지 않을 것 같은 세월도 흘러버려

우리가 비가 내리기를 기다릴 수 있게 된 것일까.


때를 만난 이 아름다운 영화는

그 선율과 풍경으로 내 마음을 울렸지만,

찾아온 그때는 나의 것이 아니어서 한편으로 몹시 가슴 아프고

나에게는 크게 설득력이 없었다.

나는 두보의 시를 안타깝게밖에 읽지 못한다.

왜냐하면 나의 삶에서 좋은 비란 언제나 늦거나 일러서

내가 아닌 다른 꽃을 위한 것이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