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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채식주의자> 차라리 탐욕 밖에 선 식물인간이 될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호평', '선댄스영화제 초청' 이런 딱지는 두 가지 방향으로 작용한다. "그 영화 궁금하네", 혹은 "졸지 않고 볼 수 있을까?" 이다. 필이 앞쪽으로 꽂히면 보는 거고, 뒤쪽으로 꽂히면 "에이 보지 말자."가 된다.

이번에는 앞쪽으로 꽂혔다. 연두와 보라, 밝은 노랑이 섞인 빛 속에 고개를 살짝 숙인 여배우의 시선이 너무 궁금했다. 포스터가 극장으로 불렀다.

참고로, <채식주의자>는 작가주의가 짙은 영화다.(좋게 말하면) 해서 불친절한 면이 있으며, 명료한 이야기는 상당부분 제거한 영화다.  원작인 한강의 소설을 살짝 훑어본 느낌과 영화의 느낌은 확연히 달랐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허무적인 시선을 좋아라 하지 않지만, 실존적 고민을 던져주는 이런 영화를 보는 것은 분명 색다른 경험이 된다.

 

차라리 탐욕에서 벗어난 식물인간이 될래

어느날 영혜는 꿈을 꾸고 일어나 육식을 끊기로 결정한다. 영화는 영혜를 채식주의자로 만든 꿈에 대한 설명이나 이유를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관객은 영상이 보여주는 영혜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의 편린들을 조합해서 영혜의 마음을 유추할 뿐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몽고반점을 갖고 있는 영혜는 채식주의자가 되면서 달라진다. 무료한 시선으로 세상사 어떤 질서와 권위, 욕구, 도리 따위에는 신경줄을 대지 않겠다는 듯 유체처럼 사람들 사이를 오간다. 육식을 강요하는 아버지의 폭력도, 허술하게 차린 옷매무새를 신경쓰는 다른 사람의 시선도 영혜에겐 신경쓸 바 아니다.


나이 어린 조카와 어울리고, 놀이터 햇빛 아래, 식물들 앞에서 평화로운 표정으로 앉은 영혜를 보면 때묻지 않은 원시림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강한 열망이 보인다. 하지만 세상은 영혜의 방식을 받아줄 수 없다. 결국 영혜는 자기 몸을 무너뜨리면서 세상의 것과 단절한다. 세상과 닿을 수 있는 촉수를 끊어내 듯, 밖에서 자신의 몸으로 들어오는 모든 음식을 거부한다.

 

생생하게 부딪혀오는 현실의 고통, 꿈이길 바래

영혜의 언니 지혜는 <채식주의자>에서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다.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늘 불안했던 어린 시절, 영혜에게 자신이 견디기 힘든 부모의 싸움 소리를 필사적으로 듣지 못하게 하고, 보지 못하게 하며 숨죽여 눈물 흘리던 지혜는 어른이 되어서도 착한 맏딸, 내조 잘하는 생활력 있는 아내가 된다.

밖으로는 평범하게 비춰질 지혜의 생활은 하루하루가 고군분투다.. 매일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려오고, 장을 보고, 상을 차리고, 집안 일을 하고, 영혜의 안부와 친정 가족의 생일을 챙긴다. 영혜에게 돌연 찾아온 변화는 지혜에겐 큰 고통이다. 내면을 알 수 없는 남편과 영혜를 견디지 못하는 가족의 성화도 지혜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다.

한 발만 내딛고 손을 휘저어도 앞길을 막아서는 정글숲 같은 일상을 지혜는 가장 태연한 표정으로 견디며 살아간다. 모대기며 돌봐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평범한 생활, 믿기지 않는 불안한 생활을 지혜는 아주 생생한 꿈일지도 모른다고 읊조린다.



현실을 견디지 못한 영혜, 현실을 모지락스럽게 버틴 지혜는 모두 상처투성이가 되어 비어버린 눈으로 세상을 본다. 평범한 삶의 필요조건과도 같은 남편, 단란한 가정은 혼란스러운 꿈처럼 지나가버렸다. 세상이 규정한 평범한 아내, 주부, 엄마의 세계에서 탈락한 순간 영혜와 지혜는 자신들에게 친근한 듯 다가왔던 의지의 대상들과도 이별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한오라기의 기운도 없는 영혜와 지혜의 시선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진심으로 나를 이해해 주는 이는 사실 없었던 거야.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겠어. 기대하고 의지하고 붙들면서 지내느라, 매달리느라 상처투성이가 됐잖아. 부질없는 것은 차라리 뱉어내고, 꿈이었던 것처럼 지워버려.'

<채식주의자>는 불친절하며, 이미지의 조각을 뿌려놓은 것처럼 혼란스러운 영화였다. 허나 동시에 사람 사이에서 지독한 고립감을 느끼며 생존의 늪을 헤쳐가는 오늘의 우리를 느끼고 때론 공감하게 만드는 영화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