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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더 리더> 역사와 한 사람 사이의 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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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게도 그래서 놀랍게도, 이념과 역사, 한 사람의 삶은 동일한 지점에 놓여 있지 않다. 그 사이에는 미묘한 그러나 결코 메울 수 없는 괴리가 있다. 때문에 한 사람의 삶을 어떤 역사적 '정의'로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는 일은 쉽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의 절대적 잣대로 그 평가가 이루어져서도 안 된다. 삶의 애매모호함 혹은 현실의 불투명함을 방기하는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역사적 과오와 '악'을 방치하는 때일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어떤 역사적 순간을 경험했던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로서 함께 이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동시적 비동시성은 '역사'를 평가하는 데에, 어떤 '역사'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대한 어려움을 배가시킨다.


홀로코스트를 인류 역사의 아주 특별한 비극으로 (그래서 이 비극이 유대인이 다른 인종에게 저지르는 죄의 면죄부 역할을 하고 있는) '절대적인 악'으로 처벌할 것을, 또한 이 고통의 역사에 철저히 사죄하기를 여전히 강하게 요구받고 있는 독일인이 어떻게 지금 그 '역사'와 대면하는지 그리하여 어떻게 이 쓰라린 역사와 화해하고자 하는지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는 어떠한 난해한 이론이나 철학을 끌어들이지도 않고 절실하고 구체적이고 대담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청년 시절의 나치 이력이 밝혀졌을 때 귄터 그라스의 반응처럼 날카롭고 인상적이게 <더 리더>의 여주인공 한나 슈미츠는 자신에게 가해졌던 그 불편하고도 무거운 질문을 이제 우리에게 똑같이 어렵고 묵직한 물음으로 되돌려준다. '어떤' 상식과 정의가 어떻게 '끔찍한' 악과 불의가 될 수 있는가? 그러한 과오를 저지른 사람을 처벌하는 것으로 우리 자신의 죄를 사할 수 있을까? 이것으로 그러한 비극의 역사가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가? 이 영화는 바로 우리 세대가 마주한 현실로서 다가온 그 질문이지, 결코 그 대답이 아니다. 때문에 당신이 이 이 용감하고 불편한 영화를 어떻게 평가하든, 이 고통스럽고 도발적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든 중요한 점은 그것이 그토록 불행했던 시절의 '기억'이 되어버린 홀로코스트를 이제 관광상품으로 팔고 있는 '현재'의 유대인을 단순히 옹호하는 식의 완전무결한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